난창봉기(南昌港)에 대한 류보청(劉寶成)의 보고
1928년 7월 7일, 유보청은 중국 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여 난창봉기에 대해 보고했다. 본 보고서는 난창봉기의 준비과정과 경험, 그리고 실패를 통해 얻은 교훈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난창봉기 관련 파일 중 가장 포괄적이고 체계적이며 가치 있는 파일이다.
류보청은 서두에 이렇게 썼다. “난창봉기는 중국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도력을 장악한 역사의 첫 페이지였다. 난창봉기는 국민당의 살육 만행에 대한 무장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와 농민.
4월 12일과 7월 15일의 반혁명 쿠데타 이후, 수많은 공산당원과 노동자, 농민이 이러한 암울한 상황에 직면하여 7월 중순에 학살당했다. 중국당 중앙임시정치국 상무위원회는 봉기의 구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당이 통제하고 영향을 미치는 군대를 난창에 집중시키기로 결정했다. 봉기를 주도한 저우언라이(周恩來)는 7월 27일 비밀리에 난창(南昌)에 도착해 봉기를 일으켰다. 7월 31일 당전선위원회는 8월 1일 보첸(Bochen)에서 봉기를 열기로 결정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비서로 하는 전선위원회, 하롱(豫龍), 예팅(葉聯), 주덕(朱德), 유보성(劉伯成) 등이 당 직속의 군대를 이끌고 난창봉기를 일으켰다.
전투는 8월 1일 이른 아침부터 6시까지 계속되었으며, 오전 9시에 중국 공산당이 참석한 합동 회의에서 3,000명 이상의 적군이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국민당 좌파들이 붙잡혀 저우언라이 등이 혁명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2일에는 롱진이 난창 인근 마후령에서 철수한 반란군도 난창에 도착했다. 8월 3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반란군은 난창(南昌)에서 출발해 광동(廣洞) 남쪽으로 향했다.
9월 후반에 반란군은 10월 초에 대부분의 지역을 거쳐 조주(潮州)와 산터우(山頭)를 점령했다. 반란군은 해산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하이루펑(Hailufeng) 지역에 침입하여 지역 농민군에 합류했다. 후난 남부에서 모택동이 이끄는 추수봉기군과 합류하기 위해 징강산에 도착했고, 두 군대가 합쳐진 후 중국혁명의 중추가 됐다. 중국공산당은 혁명전쟁의 자주적 영도와 인민군 창설, 무장 권력 장악을 통해 중국 혁명의 위대한 역사적 성취를 기념하기 위해 노력했다. 1933년 6월, 중앙혁명군사위원회는 난창봉기를 기념일로 지정하여 1949년 6월 15일 중국 노농홍군 건군 기념일로 정하였다. 혁명군사위원회는 '8월 1일'이라는 글자를 인민해방군 창건의 주요 상징으로 사용하도록 규정한 명령을 내렸다. 이후 8월 1일은 중국인민해방군 건군절로 지정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