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핵무기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북한과 남한에 최초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세운 나라라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북한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사실 한국의 핵무기 계획은 북한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심지어 일본 깡패들에게 속이기도 했습니다.
1950년대 한국의 핵개발 시도는 일본의 '깡패들'에게 속을 뻔했다.
1951년 한국의 이승만 정부는 스스로 핵개발을 시도했다. 당시 한국은 원자력 분야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고, 장비와 기술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과학 연구 지도자도 부족했습니다. 이때 오카다라는 일본인 전문가가 한국에 도착했고, 이승만은 그를 손님으로 대접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대한민국 진해 첸하이 소모도에 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핵무기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카다는 일본 전기회사의 평범한 엔지니어였습니다. 이 '일본 깡패'의 지휘 아래 한국 핵팀은 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엔지니어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매일 오카다가 센터를 돌아다니다가 서둘러 떠나는 모습만 본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오카다가 원자력 기술에 관해 연설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권완용, 김재원 등 이 팀의 선배인 과학자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오카다에게 직접 가서 그림을 먼저 꺼내도 되냐고 물었고, 연구를 수행하게 하십시오. 이들의 설득으로 오카다 씨는 그림을 건네주었는데 한국인들이 놀란 것은 이 그림이 고주파 자기장 속에서 하전입자가 고속으로 달리는 입자가속기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확실히 전기 공학 도면입니다. 핵 물리학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절망에 빠진 오카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핵무기 제조 계획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는 물을 전기분해하여 대량의 수소를 얻은 다음, 고전압 전기를 추가하여 수소를 폭발시켜 수소폭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환상처럼 보이는 이 이론을 듣고, 관완아와 다른 사람들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오카다의 정체에 의문을 품던 조선인들은 오카다에 대한 비밀 수사를 시작했고, 마침내 그 결과가 드러났다. 1953년 10월, 오카다는 추방되었습니다.
한국의 초기 민간 원자력 발전은 1950년대 미국의 원자력 평화적 이용 정책에 의해 주도되고 영향을 받았다. 한국은 1956년 2월 3일 미국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력협정을 체결하고, 3월에 원자력부를 창설함과 동시에 다수의 원자력 전문가를 미국에 파견하였다. 원자력 발전에 관한 교육과 훈련을 받는 국가 1958년까지 원자력부가 설립되어 89명을 훈련시켰다. 또한 한국은 1958년 12월 3일 미국 제너럴다이나믹스(General Dynamics), 제너럴애토믹스(General Atomics)와 100kW급 TRIGA Mark II 연구로(일반원자훈련, 연구 및 동위원소 생산로) 구입 계약을 체결했다. 1962년 3월 30일 완공되어 운전을 시작했고, 1969년에는 2000kW급 TRIGA Mark III 연구용 원자로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은 이러한 연구용 원자로를 활용하여 원자력 분야에서 대규모 연구개발 작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한국은 민간 원자력 개발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1958년 10월 1일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고,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에 착수했으며, 기반시설 구축을 위한 원자력발전소 건설 연구에 착수했다. 그리고 핵무기 프로그램을 지원할 기술적 능력.
1970년대 한국의 핵개발 재개는 미국에 의해 강력하게 저지됐다.
일본의 군사 전문가 에다 겐스케는 핵무기 개발을 위한 4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자금, 기술, 핵물질 그리고 리더의 의지. 박정희는 핵무기 개발 의지가 강하다. 또 다른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핵물질 확보다. 1970년대 초 박정희는 핵무기 개발을 위한 준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 전문기관을 설립한다. 1971년 11월 청와대에 핵무기개발위원회가 설치되었고, 관련 사항을 관리하기 위해 제2경제비서관이 신설되었으며, 1973년 겨울에는 200억원의 예산으로 핵무기 개발에 관한 극비 보고서가 구성되었다. 약 15억~20억 달러 규모이며 개발 기간은 6~10년입니다.
2. 원자력 전문가를 모집합니다. 핵무기 개발의 핵심 인물은 주재양 박사다. 그는 한국의 최형섭 과학기술처장에 의해 중국에 소개된 핵연료 분야의 국제적 권위자다. 1973년 3월에는 원자력연구소 제1부소장을 역임했고, 주(朱)는 미국, 캐나다 등을 방문하여 진저(Jin Zhe)를 비롯한 10여 명의 원자력 전문가를 소개했다. 이때 최형섭(원자력개발 사령관)→주재양(실질관리자)→김철(재처리담당) 핵심 진영이 형성됐다.
3. 재처리 시설을 구매합니다. 핵무기 개발의 핵심은 재처리 시설 확보이다. 핵무기 제조 원료인 플루토늄을 얻기 위해서는 재처리 시설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1972년부터 한국은 재처리 시설을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1972년 과학기술부 관계자들이 프랑스와 영국을 방문해 재처리시설 기술협력 가능성을 검토했다. 같은 해 한국은 프랑스가 한국을 위해 실험적 재처리 시설을 개발해 주기를 희망하면서 프랑스 원자력 엔지니어링 회사인 SGN과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1974년 3월 한국 과학자들이 NRX 실험로 수입을 희망하며 캐나다를 방문했다. 박정희 정부는 결국 프랑스로부터 재처리 시설과 기술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1972년 5월 최형섭 장관이 프랑스를 방문해 당시 프랑스 산업기술개발부 장관과 재처리 기술을 한국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프랑스 1972년 10월 한국원자력연구소는 프랑스원자력위원회(CEA)와 여러 차례 실무 접촉을 가졌으며 마침내 협력 의사를 밝혔다. 1974년에 예비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당시 한국 기자들의 보도에 따르면, 1974년 계약에 따른 재처리 공장에서는 한국에 연간 20kg의 플루토늄을 공급할 수 있었는데, 이는 핵무기 2~3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1974년 12월 주한 미국대사관은 한국의 핵 상태에 대한 평가 보고서를 워싱턴에 보냈다. 보고서는 “한국은 핵무기 프로젝트 개발의 초기 단계에 있다”고 판단했다. 1975년 3월 12일 슈나이더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미 국무부에 전화해 “한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는 10년도 안 걸릴 것으로 판단한다. 한국 정부의 고위 간부들은 핵무기 개발에 대해 확신이 없다." 핵무기는 큰 관심사이며, 우리 국민의 집념과 높은 기술 수준에 힘입어 1980년대 초반이 되면 그에 따른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외국 전문가를 유치할 수 있는 정책은 물론, 대통령 등 국가 지도자들의 참석도 "한국이 단기간 내에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다고 걱정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반대로 박정희는 프랑스의 재처리 시설 도입을 포기하고 핵무기 개발을 잠정 중단해야 했다.
박정희 정부는 핵무기 관련 기술 추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프랑스와의 재처리 시설 계약이 취소된 뒤 우회적으로 핵무기 기술 개발을 시도했다. 한국은 1976년 12월 한국원자력연료개발연구소(KNFDI)를 설립했다. 연구소 설립의 공적 목적은 민간용 원자로용 연료 생산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재처리 능력을 확보하는 데 있다. . 연구소는 프랑스 회사 SGN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 프랑스, 벨기에 등 유럽 국가에 선임연구원 20명을 파견해 후가공 기술을 습득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은 이번에 프랑스로부터 방사능후검사시설(PIEF)도 확보했다. PIEF의 공공 기능은 핵폐기물의 성능과 건전성을 시험하고 평가하는 것이지만 이 시설은 사용후핵연료를 저장고에서 뜨거운 곳으로 옮긴다. 원격조종장치로 사용후핵연료를 용해하고 측정하는 과정은 재처리의 핵심단계와 매우 유사하다. 더욱이 한국은 프랑스로부터 수입 재가공 시설을 복원하기 위해 1978년 프랑스와 비밀 협상을 재개하기도 했다.
1975년 미국이 한국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고도화하고 있다고 기본적으로 판단했을 때 국무부는 한국에 대한 '특별 양자 조치'를 권고했고, 여기에 국제 메커니즘의 통제도 추가됐다. 국제 메커니즘의 역할이 먼저 도전을 받았습니다. 한국은 1975년 4월 미국 국무부와 의회의 촉구로 NPT(비확산조약)에 서명했지만, 1975년 6월 박정희 등 정부 관료들의 연설에서는 한국이 여전히 핵무기를 보유할 것임을 시사했다. 선택하다. 이후 미국은 한국이 핵 프로그램을 완전히 중단하도록 경제·안보 조치를 동원해 설득하기로 결정했다. 첫째, 미국은 한국의 고리 2호기에 대한 한국수출입은행의 2억9200만 달러 대출과 미국이 계획 중인 다른 원자로에 제공하는 일부 헐값 대출 및 기술 지원을 보류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미국도 한국에 재처리 시설을 수입하지 말라고 설득하고 있는데, 이는 한미가 동아시아 지역에 다자간 지역 재처리 공장 건설을 지원할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 이 메시지는 슈나이더 한국 대사를 통해 박정희에게 전달됐지만 효과가 없었고 키신저는 나중에 미국의 안보 공약을 철회하겠다고 위협했다. 키신저는 이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1975년 말 필립 하비브 국무부 부장관을 보냈습니다. 하비브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대면대화에서 미국이 핵우산 탈퇴를 포함해 안보동맹 전체를 재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1991년 미국이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한 이후 2017년 한국에 대한 미국의 확장억제력은 주로 태평양과 미공군에 배치된 해상 핵전력에 의해 제공됐다. 한미 안보협의회의(SCM) 연례 성명을 통해 채택됐다.
그는 또한 한국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중단하면 미국은 한국의 민간 원자력 개발을 위한 기술적, 경제적 지원을 늘릴 것이라고 암시했습니다. 박정희 핵개발 후반기에도 미국은 한국의 핵개발 활동에 여러 차례 직접 간섭했다. 일례로 대덕과학도시에 위치한 PIEF 시설이 완공된 이후 미국 내에서 침해적이고 비정규적인 검사의 초점이 됐다. 1978년 한국이 프랑스와 협상을 재개했다는 사실이 미국에 알려지자 카터 미국 대통령은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총리와 직접 연락해 협상을 저지했다. 게다가 박정희 정권이 후기에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TFTF 원자로는 박정희 암살 이후 미국의 압력으로 중단됐다.
박정희는 왜 핵무기 개발을 하려 하는가? 1971년 11월 박정희는 국방관련 중화학공업 고위관리에게 “한반도 주둔 미군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우리의 국가안보가 취약하다. 자주, 우리는 미국의 군사적 보호에 대한 의존을 버려야 한다…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가?” 박정희는 한국의 국방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슈퍼 무기'를 사용하기를 희망한다.
한국의 핵개발 정도. 박정희 정부 말기 한국의 핵무기 프로그램은 어느 정도 진전됐는가? 신유련 공보비서는 1979년 1월 박정희가 비밀리에 “1981년 초에 첫 번째 핵무기를 완성할 것이며 그때까지는 김일성이 남침을 감히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 박정희도 계획했다. 이 핵무기는 1981년 국군의 날 열병식에서 전 세계에 전시됐다. 우리나라 원전사업 총괄 김동훈 박사는 “1979년 10월 박 대통령이 사망할 당시 설계가 완료됐고, 관련 개발 작업이 계획보다 조금 늦어졌지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1978년 핵연료처리시설이 완공되고, 박정희 대통령이 준공식에 참석했다. 1979년 한국 학자 하영선은 한국의 핵능력에 대해 “한국은 핵분열성 물질을 확보하려고 한다. 현시점에서 한국은 북한보다 최소 6년은 앞서 있다”고 평가했다.
전두환 집권 이후 한국의 핵무기 사업은 축소·중단됐다. 노태우 정부 시절 합참은 북핵 문제를 우려해 포괄적 핵무기 프로그램 발사 보고서를 제출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 제안에 대해 즉각 거부권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이 이 사건을 알고 한국에 압력을 가한 후에야 거부권을 행사했다. 1991년 11월 8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국은 핵무기를 제조·보유·저장·배치·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핵연료 재처리·정제시설도 보유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1990년대 중후반, 한국은 국내 재처리 시설을 개발하거나 해외에서 재처리를 하겠다는 희망을 거듭했으나 미국의 방해로 중단됐다.